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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마당 > 말씀나눔 > '갑(甲)'은 없었다
'갑(甲)'은 없었다
정영수
작성일 : 13-06-18 17:32  조회 : 20,569회 
 역법(曆法)에서 쓰던 주기 중에 십간(十干)이 있다. 자(子) 축(丑) 인(寅) 묘(卯) 하는 십이지(十二支)와 엮어 “갑자(甲子) 을축(乙丑)”해가면서 60갑자(六甲)를 짚은 것이다. 십간은 10개이고 십이지는 12개라서 짝이 맞지 않아 최소공배수를 내면 60이 나온다. 십간은 열흘, 즉 한 달의 상순 중순 하순을 정하는 1순(旬)에서 왔다. 갑(甲) 을(乙) 병(丙) 정(丁) 순으로 10개가 되는데, 점술가들은 음양오행을 따져 점(占)을 치기도 한다.
 
  아라비아숫자 1, 2, 3, 4가 들어오기 전에는 갑, 을, 병, 정으로 순번을 정하는데 쓰다가 언제부터인가 서열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즉 갑은 상급자, 을은 하급자의 위치에 둬 ‘갑종(甲種)’ ‘을종(乙種)’도 나왔다. 갑은 을에 비해 우월적인 위치에 있기 때문에 강자의 입장인 반면, 을은 갑의 요구를 들어주어야만 하는 약자의 위치에서 상하관계가 형성됐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반상이 엄연하여, 양반과 상민이 갑을관계에 있었다. 서양에서도 노예와 노예주, 또는 지주와 소작인이 업주와 노동자 관계로 변화되었지만 상하 관계는 여전하다. 지금은 자발적 계약관계가 이루어져 얼핏 보면 평등한 것 같아도 사실상 불평등한 관계에서 약자는 늘 갑에게 당하고 사는 것이 현실이다.
 
  숨죽이고 있던 을(乙)이 들고 일어났다. 19세기 아일랜드 어느 영지의 관리인이었던 보이콧(Boycott)이 소작료를 못내는 소작인들을 내쫓으려 했다. 당장 갈 데가 없는 소작인들은 단합하여 어느 날 갑자기 일터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자 지주는 책임을 물어 관리인 보이콧을 내쫓는다. 갑(甲)의 위치에 있던 보이콧은 이름난 악덕 마름이었기 때문에 농민들의 배척을 받았던 것이다. 보이콧의 유래다.
 
  지금은 보이콧이라는 말이 특정 회사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구입하거나 사용하지 않기 위한 행위, 즉 불매동맹을 뜻하기도 한다. 최근 한 우유회사에 대한 불매운동도 SNS를 통한 을(乙)의 폭로와 여론 호소에서 비롯된 것. 급기야 물의를 빚은 기업은 사장과 임원들이 직접 나와서 머리를 숙였다. 불공정 거래의 감시와 개선은 진즉 정부가 했어야 할 일이나, 을(乙)이 스스로 자구책을 들고 일어날 때까지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사보타주(Sabotage)도 을의 반란이다. 고의적인 사유재산의 파괴나 태업 등을 통한 노동자(乙)의 쟁의행위이었다. 프랑스어의 사보(Sabot), 즉 나막신이라는 말에서 에서 나왔는데, 중세 유럽 농민들이 영주의 부당한 처사에 항의하여 수확물을 사보로 짓밟은 데서 연유한다. 우리말로는 흔히 태업(怠業)으로 번역하고 있다.
 
  갑을관계의 대표적인 사례는 식품업체의 대리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상품 공급업체와는 철저한 갑을 관계에 있다. 유통업체가 상품공급업체보다 힘이 약하기 때문에 무리한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 강압적으로 제품을 떠넘기는 이른바 ‘밀어내기’ 횡포다.
 
  얼마 전 대기업 임원이 기내에서 여승무원에 폭행을 가한 사건을 계기로 갑과 을의 불평등관계가 불거져 나왔다. 갑과 을의 관계를 웨이터 룰(Waiter Rule)에 비유하기도 한다. 즉 “당신에게는 친절하지만, 웨이터나 아랫사람에게 무례한 사람은 절대 좋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내용이다. 술집의 웨이터나 부하직원 등 사회적 약자계층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대기업이 임원급 인사를 채용할 때 적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어느 회사대표가 호텔주차원을 폭행한 사건도 웨이터 룰과 빗대어볼 수 있다. 오죽해야 ‘을사(乙死)조약’이라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대체로 성실하게 이뤄지지 않은 부도덕한 부(富)와 권력이 사회병리현상으로 들어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조직에서 서열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주종(主從)의 관계는 사라져야할 구시대의 유물이 아닌가. 때늦은 감은 있으나, 정부에서는 각종 협약서에서 ‘갑 을’을 빼기로 했다는 뉴스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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