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서 흔히 쓰는 크리스토퍼(Christopher)라는 이름은 아무나 쓸 이름이 아니었다. 수난기(Passio)에 따르면 크리스토포로(Christophorus)라는 성인은 가나안 사람이었는데 그에 대한 전설이 있다. 힘이 장사인 거인으로서 큰 강가에서 사람들을 건네주고 삯을 받아 끼니를 이었다. 하루는 손님 중에 어린이가 있어 우습게 알고 번쩍 들어 어깨에 메고 나르려하는데, 그 무게가 온 세상을 짊어진 만큼이나 무거워 넘어지고 말았다. 알고 보니 그 어린이는 그리스도였고 취초로 예수그리스도를 업어 나른 사람이 된다. 크리스토포로는 이교도이었으나 그 인연으로 세례를 받고 끝내는 성인의 반열에 오른다.
이후부터 크리스토퍼라는 이름은 ‘예수를 업어 건넌 자’라는 의미를 지니게 됐다. 매우 신앙심이 돈독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olumbus)다. 독실한 가톨릭국가였던 이탈리아의 항구도시 제노바 출신의 콜럼버스는 어릴 적 바다저편으로 사라지는 커다란 배를 바라보는 것이 낙이었다. 배는 저 멀리 사라지는 게 아니라 마치 물속에 가라앉는 것처럼 마스트가 물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다 지구는 둥근 것이다.”
콜럼버스는 커다란 배를 만들어 금과 향료의 나라 서인도라고 믿었던 신대륙을 발견하는 것이 일생의 소원이었다. 고국에서는 끝내 정신나간사람 취급을 받아 해양대국 에스파냐를 찾아가 통 큰 이사벨여왕의 도움으로 산타 마리아호를 건조한다. 1492년 콜럼버스는 이 항해에서 신대륙을 발견해 이사벨여왕에게 바쳤다. 그의 유해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스페인 남부의 세비야(‘세빌리야’는 틀린 발음)대성당에 안치돼 있다.
콜럼버스는 처음부터 이사벨라여왕을 사모했으나, 이사벨라는 이슬람에 대항하기 위해 아라곤 왕 페르난도와 정략결혼을 해버려, 여왕을 가슴에 묻어두고 일생을 살았다. 지금도 그가 출항한 안달루시아의 과달키비르 강변에 있는 콜럼버스 동상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은 이사벨라 여왕이 거처하던 왕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처럼 ‘크리스토퍼’가 붙는 이름이 많다. 피아노(Piano Forte)를 만든 이탈리아의 크리스토포리(Christofori), <라이언의 처녀>에 나오는 영국의 미남배우 크리스토퍼 존스(Jones)가 그렇다. 할리우드영화 <슈퍼맨>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크리스토퍼 리브(Christopher Reeve)도 우리의 기억 속에 생생하다.
지난 7일 같은 이름의 영국배우 크리스토퍼 리(Lee)가 향년 93세로 세상을 떠났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메르스(MERS)의 고통 속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호흡기 질환으로 입원한 크리스토퍼 리는 결국 그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우리가 고등학교 때 <드라큘라(Dracula)>라는 생소한 이름의 영화를 보고 가위눌린 기억이 있을 것이다. 드라큘라는 영국의 괴기소설가 B. 스토커의 소설 <흡혈귀 드라큘라>의 주인공 이름이다. 1958년 이 영화의 타이틀 롤을 맡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키가 195센티로 역사상 가장 키 큰 주연 배우였던 크리스토퍼 리는 드라큘라 백작 등 성격 배우, 악당 전문배우로 자리를 굳혔다. 최근에는 <반지의 제왕>에서도 열연해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지난해 개봉한 영화 <호빗(Hobbit)>이 그의 유작이 된 셈. 2009년에는 문화계에 기여한 공(功)으로 기사작위를 받아 경(卿 ‧ Sir)의 칭호를 붙여 크리스토퍼 리 경으로 통한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