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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마당 > 말씀나눔 > 고요한 아침의 나라--노르베르트 베버 독일 인 신부의 한국 답사기
고요한 아침의 나라--노르베르트 베버 독일 인 신부의 한국 답사기
우재구
작성일 : 12-12-02 07:50  조회 : 22,375회 
고요한 아침의 나라
 
우리 성당 김형준 프란시스코 신부님 배려 덕택에 금년 9월 7일부터 매주 금요일 마다 열린 수원교구 복음화학교 강의를 듣는 영광을 가졌다. 강의는 10주 만에 끝났다. 8주 째 강의를 담당한 분도출판사 사장 선지훈 신부께서 삶의 나침반이 되는 신앙서적 여러 권을 소개하셨다. 그 중 독일인 신부 노르베르드 베버(Norbert Weber)가 1915년에 출판한 “고요한 아침의 나라(Im Lande der Morgenstille-2012년 5월 박일령, 장정란 옮김, 크기 570쪽)”가 눈에 띠여 구입하여와 바로 읽어 보았다.
 
당시 중국의 산동반도 독일령 청도를 떠나 일본을 거처 1911년 2월21일 부산에 도착한 베버 신부는 1905년에 준공, 개통된 경부선 철도를 타고 서울에 왔다. 서울을 시작으로 의왕, 수원, 천안, 공주를 둘러보고 서울로 돌아와 몇일 쉬다가 항해도 해주와 신천, 안악, 진남포, 평양을 거처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넉달 동안의 답사 여정이었다. 그 후 곧 대구와 부산을 거처 동아프리카로 떠났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독일 대사 크뤼거 박사를 만났고 그와 함께 총독 데라우치도 만났다.
 
그 자리에서 그간 일본이 한국에 투자한 내역을 이야기 들었다. 특히 1911년 한 해만도 일본이 조선에 투자한 돈은 5600만 엔이었다. 한국인들 사이에 유통되는 통화량(정확한 계념 알 수 없슴)이 매년 800만 엔의 7배가 넘는 돈을 쏟아 부는 다는 이야기였다. 이 많은 돈을 철도, 항만, 교량, 도로 건설 등 기타 식민지 건설에 지출 한다고 설명했다.
 
1894년 명성황후 시해 이후 1895년 동학난 수습을 위해 고종이 요청한 청국군을 맞아 싸워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1904년 러시아마저 때려눕힌 일본은 한반도는 이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기의 소유물이 되었다. 부산의 항만 공사와 경부선 철도 건설 사업을 1905년, 경의선은 1906년에 준공하는 등 실질적인 한국의 주인 자리를 차지한 일본은 5000명의 군대만으로 1910년 8월 29일 조선을 병합하였다.
 
나라를 빼앗기고 민족의 혼마저 잃고 살아가던 한국을 찾아 온 그는 그해 2월부터 6월까지 천주교 신자들과 먼저 와 있었던 외방교회 프랑스 신부들의 안내를 받으면서 무엇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관찰하기 위해 위에서 말한 지역을 다니면서 본대로, 들은 대로 매일 일기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때로는 조롱말 위에서, 때로는 가파르고 험준한 산마루에서도 여행기를 썼다. 대단한 열정이었다.
 
무거운 사진기를 노세에 싣고, 또 때로는 들고 다니면서 찍은 우리 “조용한 삶”을 그대로 수록하였다. 고관들과 소위 양반들의 지도와 편달을 받기는 커영, 긴 세월 동안 착취와 억압만을 받아 오던 우리 민초들의 모습을 그대로 사진에 담았다.
 
당시 부산 항만 공사장을 비롯하여 땔감을 채취 하는 농부, 긴 담배대를 문 노인, 지게를 진 일꾼, 장옷 입은 여인, 빨래터, 길모퉁이에서 벌어진 장기판, 방바닥에 앉아 공부하던 학교, 동소문과 그 주변, 작두로 볏짚 썰기, 초가 이엉 얹기, 다듬이 질 모습, 담배 시장, 수원의 화성문, 옹기장이, 엿장수, 돗자리 짜는 자리틀, 물레방앗간, 염주를 든 승려 모습, 머리에 쓴 삿갓, 장례식 차일, 출상과 장례행렬, 물래질 하는 여인들, 물지게꾼, 물방아간, 배틀 짚신 삼기, 절구질, 기름틀, 도리끼질, 떡메질, 혼인 잔치, 혼행길, 새색시가 탄 가마, 용두래, 멸치 건조작업 모습, 당시 대동강 모습, 북한산 창의문 홍예 등 당시 우리 선조들의 삶의 모습을 290점의 사진에 담아 그대로 보였다.
 
가난과 함께 하는 예수님의 선교 정신으로 무장한 신부의 눈에 비친 조선의 모습은 애처롭고 안타까우며 따라서 무한한 사랑과 연민의 정을 나누며 힘든 여행을 하였다. 그 속에서도 우리 전통 문화의 뿌리와 아름다움에 찬사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농촌에 까지 파고 든 일본인들은 저마다 이익을 앞세워 세련된 영농 기법으로 농토를 경작하게 되니 이대로라면 한국인들은 계속 자리에서 밀려 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경제적으로도, 정치 영역에서와 같은 신세로 전락하기 전까지 한국인들은 이 점을 알아 차리지도, 변화시키지도 못할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물론 경제적으로도 이미 “일본인이 주인”이고 “한국인은 종이다” 라고 개탄하였다.
 
부산에서 그의 다음 행선지 동아프리카로 떠나면서 멀어져 가는 우리의 강산을 바라보고 이렇게 서술하였다. “한 국가로서 이 민족은 몰락했다. 다시는 소생하지 못할 것이다. 파도 너머로 이 순박한 사람들에게 말없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마 이들은 나라를 망친 자신들이 통치자 아래서 보다 외세의 지배 아래서 더 복될지도 모르겠다. 마치 한 민족을 땅에 묻는 장례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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