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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06-28 12:10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3,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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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외로운 넋
- 1866년 병인박해 당시의 순교자 구(具) 다두의 묘소는 아직 세인의 관심을 끌지 못한 다른 수많은 성지, 사적지들과 마찬가지로 잡초만이 무성해 순례자들의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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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 남도 남단 함안군 대산면 가등 부락에 모셔진 순교자 구 다두의 묘가 확인된 것은 그가 순교한 지 너무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였다. 23세의 꽃 같은 나이로 오직 천주를 모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초개같이 목숨을 던진 청년 구 다두, 순교한 뒤 그의 유해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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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혹독하기 그지 없었던 박해 속에서 누가 감히 천주학쟁이로 지목받아 처형된 이들의 유해를 고이 보전하도록 배려했을 것인가. 지금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성인들과 잘 알려진 순교자들은 물론, 천행으로 가족이나 친지의 배려와 증언 등을 통해 유해가 따로 모셔지거나 적어도 그 행적을 찾을 수 있는 순교자들은 실마리를 제공한 사람들의 덕분이다. 하지만 그렇게 잘 알려진 순교자들보다는 오히려 전혀 아무런 기록도 증언도 없이 다만 아침 햇살이 비치면 사라지는 이슬처럼 형장에서 희광이의 칼날 아래 스러진 이들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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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 다두 역시 자칫하면 그 유해도 행적도 묘연할 뻔했으나 천행으로 그 묘소가 학인됨으로써 후손들에게 신앙의 유산으로 남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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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 다두의 묘를 확인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함안 본당 대산리 공소 회장인 윤 바오로의 증언에 힘입은 바 크다. 윤 바오로는 구다두의 처조카인 최성순을 통해 구 다두의 묘가 "신(愼)씨라는 사람의 묘벌 안에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 증언의 내용은 관내 대산면 하기리에 사는 한 노인의 말, 즉 "신(愼)씨 묘소 안에 진주 옥에서 풀려 나와 그 장독(杖毒)으로 죽은 사람의 묘가 있다."고 하는 말과 완전히 일치했다. 그리하여 신씨 묘소를 살펴본 결과, 신씨네 묘 우측에서 봉분이 거의 없어진 묘를 발견하게 되었고 발굴 결과 구 다두의 묘소임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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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 다두는 원래 함안 미나리골의 중인 계급 출신으로 신심이 돈독하고 믿음에 충실해 1866년 병인박해 직전에 리델 신부의 복사로 거제도까지 가서 전교 활동을 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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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병인박해가 일어나고 그 해 진주 포교에게 잡힌 그는 인정 사정 두지 않는 혹독한 매를 맞고 겨우 풀려 나온다. 하지만 무수한 매가 남긴 장독(杖毒)은 그로 하여금 풀려 나온 지 불과 7일 만에 선종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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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때 그의 나이 23세. 지금 같으면 한창 부모의 사랑을 받고 바야흐로 사회에 첫발을 디디려는 젊은이가 눈뜨고 차마 못 볼 그 숱한 매를 한몸에 받고, 또한 살아서 호강하지도 못하고 죽어서조차 제대로 된 묘석 하나 없는 쓸쓸한 묘소에 묻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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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간단한 제대와 아담한 하얀 십자가가 순례자의 눈길을 끈다. 그나마도 없었다면 이곳이 순교자의 묘임을 어느 누가 알아볼 수 있으랴.[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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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속 : 마산교구
- 주소 : 경남 함안군 대산면 가등 부락
- 전화 : 대산 본당 사무실 (055) 582-8041
- 위치 : 경남 마산시에서 창녕쪽으로 5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칠원면 소재지를 1.5km 지나면 삼거리가 나타난다. 좌회전하여 의령으로 빠지는 1041번 지방도로 접어들어 도둑 고개를 넘어서 가다보면 길 오른쪽으로 대영 주유소가 나타난다. 여기서 더 내려가면 우측에 대산초등 학교가 보이고, 학교 입구에서 100m 지점 좌측에 신등마을 푯말이 나타나면 좌회전한다. 좌회전해서 500m 직진, 다시 좌회전해서 100m 우측 산 밑에 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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