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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06-28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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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조회 : 3,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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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블뤼 주교의 생생한 흔적
- 충남 당진군 구합덕 본당에서 택시나 승용차로 20분 남짓 달리면 신리 공소를 찾을 수 있다. 구불구불한 길에 특별한 지형 지물이 없어 택시 기사나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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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30평 정도 됨직한 자그마하고 조금은 초라해 보이는 공소, 신리 유적지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볼품 없는 모습이지만 마당의 돌 하나하나, 건물 안에 깔린 나무판대기 한조각 한조각마다에는 당시 신앙 선조의 땀방울과 기도 소리, 그 숨죽인 발걸음의 흔적이 가득 배어 있는 듯하다. 마당에는 순교 복자 기념비와 성모상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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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집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온 것은 거의 기적이라고까지 할 만하다. 1866년의 병인박해때 다블뤼 안(Daveluy, 安敦伊)주교를 비롯한 여러 신부들이 체포되기 전에 피신한 이곳에는 당시의 유물들이 보존되어 오고 있다. 원래는 초가집이었으나 해방 후 양철 지붕으로 개량해 소강당으로 꾸몄다. 이 집에서 다블뤼 안 주교와 여러 신부들은 신유박해와 기해박해 그리고 병오박해 당시 순교한 신부 등과 평신도들의 행적을 조사하여 한국 가톨릭 교회사를 집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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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으로 조선 교구 제 5대 교구장을 지낸 다블뤼 안 주교는 1845년 7월 하순 상해로 가 한국 교회 최초의 방인 사제 김대건 신부와 함께 그 해 10월 12일 전라도 강경의 황산포(黃山浦)에 첫발을 내디뎠다.
성지 입구 |
성지 전경 |
공소 전경 |
새 공소 외부 |
- 그 후 그는 병인박해의 와중에서 1866년 순교하기까지 21년 동안 조선의 선교사로 활약, 당시 가장 오랫동안 조선에서 활동한 선교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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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가장 큰 업적은 한국 천주교회사와 조선 순교사의 편찬이었다. 그는 이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을 교구장으로부터 위촉받고 1857년부터 이를 위해 새 자료를 발굴해 그것을 프랑스어로 옮겼으며 목격 증인을 찾아 증언을 수집하는 데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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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1859년을 전후해 그는 윤지충 등 주요 순교자들의 전기를 파리 본부로 보내는 한편 조선 천주교회사의 편찬을 위해 조선사에 관한 비망기와 조선 순교사에 관한 비망기를 저술해 1862년 모두 파리로 보냄으로써 후세의 귀중한 사료가 될 수 있었다. 더욱이 1863년에 그의 집에 불이 나 조선말과 한문으로 된 치명 일기와 주석책등 귀중한 자료가 모두 타 버렸기 때문에 이 책은 한층 가치 있는 것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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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이 집에서 수집, 기록한 순교사 및 역사 자료 7권이 1862년 10월 홍콩의 리부아 신부를 통해 파리로 전해져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두 권이 나오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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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이 집에는 안 주교가 체포되기 바로 전날인 1866년 3월 11일 고향의 부모님께 마지막으로 보낸 눈물겨운 최후의 편지가 기념으로 액자 속에 끼워져 있다. 이 편지는 만주의 베롤(Verolls, 方) 주교에게 보내 프랑스에 있는 부모에게 전달하게 한, 이 세상에서는 마지막으로 올린 글(上書)이었다. 그는 1866년 베르뇌 주교에 이어 3월 11일 붙잡혀 옥중에서 갖은 고문을 받고 충청도 보령의 수영으로 압송돼 3월 30일 참수됐다. 베르뇌 주교를 도와 9년 동안을 부주교로서 그리고 주교의 순교 후 조선 교구의 5대 주교가 된 지 21일 만에 장엄하게 순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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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에는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여의도에서 시성됐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신리와 갈매못 - 성인들의 체포와 순교지
- 여사울이 초기 교회의 못자리였다면, '신리'(당진군 합덕읍 新里) 일대는 박해 후기의 사적지였다. 내포 공동체는 거듭되는 박해로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지만 끈질기게 복음의 생명력을 이어가면서 언제나 새로운 지도자들을 탄생시켰다. 그 중에서도 우리는 거더리(예산군 고덕면 상궁리) 출신의 성인 손자선(孫 토마스)을 기억하고 있다. 1866년에 공주 관아에서 자신의 살점을 물어뜯어 신앙을 증거한 분으로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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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거더리와 붙어 있는 마을이 바로 신리이다. 현재의 행정 구역상으로는 두 마을이 구분되어 있지만 교회사의 기록에 나타나는 거더리와 신리는 결국 같은 지역으로, 성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가 체포되었던 박해 시대의 교우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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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블뤼 주교는 1845년 10월, 한국에 입국한 이래 주로 내포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한국 순교사와 교회사 자료 수집에 열중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저 유명한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備忘記)가 이 곳 신리에서 작성될 수 있었다. 그러나 1863년 주교의 거처에 화재가 발생하여 오랫동안 수집해 놓았던 귀중한 자료들이 타 버리고 말았다. 다행한 것은 다블뤼 주교가 그 전에 이미 순교사와 교회사를 정리하여 프랑스로 보낸 점이었다.
야외 십자가 |
야외 십자가 |
공소 뒷마당 |
새 공소와 수녀원 |
-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때, 다블뤼 주교는 신리(거더리)에 있는 손치호(니콜라오) 회장 집에 머물고 있었다. 손 회장은 바로 손자선 성인의 숙부이다. 주교는 그 때 이웃에 있던 오매트르(Aumaitre, 吳) 신부와 위앵(Huin, 閔) 신부를 불러오게 하여 피신할 방도를 의논하고 헤어졌는데, 3월 11일 포졸들이 거더리로 몰려와 주교와 복사인 성 황석두(黃錫斗, 루가)를 체포하고 말았다. 이어 위앵 신부가 멀지 않은 소재(예산군 봉산명 금치리)에서 체포되었고, 오매트르 신부가 거더리에 들렀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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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블뤼 주교 일행은 서울로 압송된 후 몇 차례의 신문에 이어 군문효수형의 판결을 받게 되었다. 이 때 제천 배론에서 체포된 성 장주기(張周基, 요셉) 회장이 그들 일행에 포함되었다. 그런 다음 이들 5명은 새 처형 장소로 결정된 '갈매못'(보령군 오천면 영보리의 고마 수영)으로 이송되어 3월 30일에 순교하였다. 굳이 이 곳까지 순교자들을 끌고 와서 처형한 이유는 궁중에서 고종비(高宗妃)의 간택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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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 여사울의 이존창 생가 터와 신리의 주교 댁은 오랫동안 잊혀져 오게 되었다. 그러나 신리의 주교 댁만은 인근 교우들 때문에 성 손자선이 태어난 곳이며, 다블뤼 주교의 거처라고 알려져 왔다. 이에 합덕 본당의 페랭(Perrin, 白) 신부는 1927년에 교우들의 협조를 얻어 이를 매입한 뒤 순교 기념비를 건립하고 축성식을 갖게 되었다. 당시까지도 신리 공소는 초가집이었으나, 훗날 지금과 같이 함석 지붕을 새로 이었다고 한다.
새 공소 외부 |
새 공소 내부 |
무명 순교자묘1 |
무명 순교자묘2 |
- 이처럼 여사울은 내포 교회가 시작된 곳이며 신리는 내포 교회가 박해를 극복해 나가던 교우촌이었고, 갈매못은 성인들의 순교 터였다. 이들은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보이지 않는 역사의 끈으로 이어져 왔으며, 그 끈은 오늘의 교회를 지탱해 주고 있는 생명선과 같은 것이 되었다. 체포되기 직전에 다블뤼 주교가 동료인 만주 교구장에게 쓴 1866년 3월 10일자 서한에서 순교자의 마지막 행로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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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구장 베르뇌 주교와 선교사들이 체포되었습니다. 피할 길이 없습니다. 내 차례도 올 것이니, 제가 싸움터에서 견디어 낼 수 있기를 하느님께 청합니다([교회사 연구] 제2집, 1979년, 199면).
- [출처 : 차기진, 사목 248호(1999년 9월호), pp.116-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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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속 : 대전교구
- 주소 : 343-902 충남 당진군 합덕읍 신리
- 전화 : (041) 363-1061
- 위치 : 충남 당진군 합덕읍에서 예산 쪽으로 32번 국도를 따라 2㎞ 정도 내려오면 합덕교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기 바로전에서 우회전하여 수로를 따라 4.5㎞쯤 들어가면 고덕면을 알리는 푯말이 서 있다. 길 우측으로 신리 공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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