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도리 헨리꼬 신부가 체포된 선교사들의 전교 유적지
수원시 북쪽에 솟아 있는 광교산 동쪽 깊은 골짜기 안에 위치한 손골 성지는 옛 부터 향기로운 풀이 많고 난초가 무성했던 곳이다. ‘향기로운 골짜기’라는 뜻을 지닌 손곡(蓀谷)의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1839년 기해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이 이룩한 교우촌으로 병인박해(1866년) 때에는 10여 호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손골은 주민들 사이에서 신자들의 부락 ‘성교촌’이라 불리어 오는데 특히 이 요한, 그의 아들 베드로, 손자 프란치스코 삼대가 손골에서 살던 중 병인박해 때 피신하여 1871년 3월 16일에 순교하였다 한다.
손골은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전교 유적지로서 특별히 성 도리(Dorie, 金, 1839~1866, 헨리꼬) 신부가 1865년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하다가 병인박해 때 포졸들에게 체포된 곳이다. 또 이곳은 1857년 입국한 페롱(F´eron, stanislas,權, 1827~1903) 신부, 1861년 4월 말부터 대략 1년 남짓한 기간 조안노(Joanno, 吳, 1832~1863, 베드로) 신부, 칼레(Calais, 姜, 1833~1884, 알퐁소) 신부 등이, 1863년에는 오메트르(Aumaitre, 吳, 1837~1866, 베드로) 신부 등이 입국하여 주로 조선말과 풍습을 배우던 곳이고, 조선 제4대 교구장인 베르뇌(Berneux, 張敬一, 1814~1866, 시몬) 주교도 방문(1861년과 1863년)했던 곳으로 신앙의 전통이 계속 이어져 내려오는 유서 깊은 성지이다.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에 의하면 페롱 신부는 손골에서 자신의 어머니에게 자신이 한 지역의 전담 신부가 됐음을 알렸고(1857년 10월 17일자 서한), 조안노 신부는 손골에서 조선말을 배우고 있으며 칼레 신부도 와서 합류했다고 하였다(1861년 10월 22일자 서한). 이를 통해 손골이 선교사들의 조선말 학습 장소이자 사목 지역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오메트르 신부는 1863년 6월 19일부터 1864년 9월 10일까지 손골에서 15통의 편지를 썼다.
성 도리 헨리코 신부는 1839년 9월 3일 프랑스 성 틸레르 드 탈몽의 한 농가에서 팔 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1864년 5월 21일 사제품을 받았고 그 즉시 조선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이듬해 5월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1838~1866, 유스토), 볼리외(Beaulieu, 徐沒禮, 1840~1866, 루도비코), 위앵(Huin, 閔, 1836~1866, 마르티노) 신부 등과 함께 조선에 입국하였다.
입국 후 경기도 용인의 손골에 배속되어 선교하던 중 1866년 2월 27일 체포되어 3월 7일 새남터에서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신부, 볼리외 신부 등과 함께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 파리외방전교회(The Society of Foreign Missions of Paris)1658년 7월 29일 창설되고, 1831년 9월 한국 선교에 처음 진출하여 한국 천주교회의 초창기 발전은 물론 교회를 통하여 한국 민족과 고락을 같이 한 선교 단체이다. 파리 외방전교회는 파견된 포교 지역에서 교회를 조직하고, 현지인(現地人) 성직자를 양성하여 그들에 의해 교회가 운영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창립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에 4,000여 명의 선교사들이 파견되었는데 그중 170여 명이 한국에 파견되었다. 오랜 역사 동안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선교사 170명이 살해되었는데 그 중 24명의 선교사가 한국에서 살해되었다.